도시 속 조용한 산책 코스 전주 완산공원 산책길 – 오래된 돌계단 위의 사색

도시 속 조용한 산책 코스 전주 완산공원 산책길 – 오래된 돌계단 위의 사색

 

 

돌계단 위에서 시작된 오후의 고요

 

전주의 중심부에 자리한 완산공원은 오래된 도시의 맥박이 가장 느리게 뛰는 곳이다.
전동성당이나 한옥마을이 사람들로 붐비는 반면,
이곳은 여전히 나무와 돌, 바람과 새소리로 이루어진 시간의 공간이다.
나는 어느 봄날 오후, 도시의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곳의 돌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완산공원의 돌계단은 생각보다 길고, 생각보다 조용하다.
발 아래에는 이끼가 얇게 덮여 있었고,
곳곳에는 낙엽이 눌려 있었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작은 먼지가 일었지만,
그 소리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바스락거림이 오래된 책장을 넘기는 듯한 감정을 일으켰다.

그날의 공기는 부드러웠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강하지 않았고,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살짝 차가웠다.
그 미묘한 온도의 차이 속에서
나는 도시의 시간과 나의 호흡이 묘하게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완산공원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그곳은 전주의 오랜 역사와 사람들의 발자취가 중첩된 공간이다.
조선시대의 옛 성터가 남아 있고,
그 위에 세워진 산책길은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 존재해왔다.
누군가는 이 길에서 친구를 만났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 길에서 이별의 말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들이 계단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나는 천천히 돌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풍경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곳이 사람의 감정을 받아주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완산공원은 도시의 한복판에서
조용히 인간의 마음을 쉬게 해주는 드문 공간이다.

---

돌계단 위에서 만난 시간의 단면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 작은 쉼터가 있다.
그곳에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고,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스듬히 떨어진다.
나는 그늘진 한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에는 오래된 돌담이 있었다.
그 돌들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거칠고 불규칙한 표면 위로 이끼가 자라고,
작은 곤충들이 그 사이를 오갔다.
나는 그 돌들을 바라보며 문득 인간의 삶을 떠올렸다.
사람의 얼굴에도 세월이 새겨지듯,
이 돌에도 수많은 시간의 자취가 새겨져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벚나무 잎 몇 장이 떨어져 돌계단 위에 내려앉았다.
그 잎은 이내 바람에 흩날리며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삶의 한 장면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순간들,
그 짧은 시간 안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날의 공기에는 비 온 뒤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흙냄새와 나무향이 섞인 그 냄새는
마치 오래된 추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 같았다.
나는 그 냄새 속에서 어린 시절의 산책길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르던 공원의 돌계단,
그때의 공기와 지금의 공기가 겹쳐졌다.
세월은 흘렀지만,
돌계단의 감촉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시간이 돌 위에 머문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단단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돌계단은 점점 가팔라졌고,
숨은 조금 가빠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사람이 계단을 오를 때,
몸은 힘들지만 생각은 단순해진다.
그 단순함 속에서 나는 여러 감정을 정리했다.
복잡했던 일상,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지 못했던 질문들이
조용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

산책길의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를 마주하다 

돌계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작은 전망대가 있었다.
그곳에 서자 전주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붉은 지붕의 집들,
멀리서 반짝이는 유리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는 도로 위로 천천히 움직이는 차량들.
그 모든 풍경이 낮은 빛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시간이 이렇게 흘러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도시의 하루가,
수많은 사람의 삶이,
이 순간에도 저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복잡한 시간의 흐름이
이곳에서는 한순간 멈춘 듯했다.
공기마저 느려진 듯한 고요함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느꼈다.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들이 살짝 흔들리고,
그 사이로 새소리가 섞였다.
그 소리는 작았지만, 이상하게 또렷했다.
나는 그 순간,
‘자연이란 결국 소리 없는 대화’라는 생각을 했다.
완산공원의 바람은
사람에게 조용히 말을 건다.
“조금 쉬어가라.”
그 말이 바람결을 타고 내 마음에 닿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 도시를 바라보며 메모장을 꺼냈다.
적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생각은 많았다.
삶이란 결국 이런 순간들의 누적이라는 사실을
이 돌계단 위에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거창한 목표나 화려한 말보다,
지금 눈앞의 빛과 바람이 더 진짜였다.

완산공원의 돌계단은 사람을 멈추게 만든다.
그 멈춤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바쁘게 살던 나에게
이 고요한 길은 일종의 ‘정지 버튼’ 같았다.
나는 오랜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를 느꼈다.

---

시간 위를 걷는다는 것의 의미 

돌계단을 내려올 때쯤,
하늘은 서서히 어둑해지고 있었다.
노을이 나무 사이로 비치며 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 위를 천천히 걸으며
나는 오늘의 산책을 마음속에 새겼다.

완산공원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산책길이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시간이 겹쳐 있다.
오래된 돌 하나에도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고,
그 위로 다시 새로운 걸음이 이어진다.
시간은 그렇게 돌 위에 쌓이고,
그 흔적이 공원의 역사와 사람의 기억을 동시에 만든다.

나는 계단 아래로 내려오며
이 길을 걸은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했다.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했고,
누군가는 이별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혼자 사색했고,
누군가는 친구와 웃었을 것이다.
그 모든 감정이 이 돌계단에 스며 있었고,
그것이 이 길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완산공원의 산책길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사람은 자신을 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오늘을 살아간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돌계단 위로 저녁빛이 살짝 남아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오래된 기억의 조각처럼 따뜻했다.
그 빛 속에서,
나는 완산공원이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시간이 머무는 장소라는 것을 확신했다.